2020년 09월 13일 일요일
[녹] 연중 제24주일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24주일입니다. 사랑과 정의의 주 하느님께서는 형제들을 용서하는 우리를 용서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듯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잘못한 이들을 용서할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새로운 마음을 주시기를 청합시다.
입당송 집회 36,21-22 참조
본기도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말씀의 초대
집회서는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고 자비를 품으며,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말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는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임금에 비길 수 있다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27,30―28,7
화답송시편 103(102),1-2.3-4.9-10.11-12(◎ 8)
제2독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14,7-9
복음 환호송요한 13,34 참조
복음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18,21-35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보호자이신 주님, 주님의 종인 교회를 이끌어 주시어, 교회가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을 품고, 치유하시는 주님의 자비 안에서, 세상에 아름다움의 씨를 뿌리게 하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평화의 주님, 이 세상의 지도자들에게 지혜와 식별의 은총을 주시어, 온 인류가 한 가족임을 깨닫고 기쁨과 슬픔, 고통과 위로를 함께 나누며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3.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치유자이신 주님, 인간의 욕심과 무분별한 개발로 생겨난 질병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을 굽어보시어, 불안한 마음을 위로하시고, 하루빨리 치료제가 마련되게 도와주소서.
4. 본당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지혜이신 주님, 저희 본당 공동체에 성령을 보내 주시어, 저희가 하는 주님 사업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시고, 서로 화목하며 주님의 사랑을 삶에서 드러내게 하소서
예물 기도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7 : 그리스도의 순종과 우리의 구원>영성체송 시편 36(35),8
1코린 10,16 참조
영성체 후 묵상
▦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면 주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집회서의 저자는 말합니다. 분노를 품고서 어찌 주님께 자비와 용서를 청할 수 있겠습니까?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에서 교회는 하늘 나라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형제적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흔히 ‘교회의 복음’이라고 일컫는 마태오 복음에서 ‘형제애’란, 공동체 구성원의 상호 책임을 바탕으로 한 끝없는 용서와 화해를 가리킵니다.
예수님 시대에 아이를 사고파는 일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내와 자식을 팔아서라도 빚을 갚으라는 이야기는 가혹하기 그지없습니다. 빚의 문제가 아니라 형벌의 문제로 뒤바뀐 이 불행한 이야기는 26절부터 급격한 반전을 보여 줍니다. 종이 엎드려 애원하니 주인이 종의 빚을 탕감해 주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조건이나 약속도 없이 주인은 종의 간절한 청을 기꺼이 들어준 것입니다.
주인의 자비는 주인이 ‘빚’이 아니라 ‘부채’라는 단어를 사용한 데에서도 분명히 드러납니다. ‘빚’(오페이레테스)은 상당한 책임과 의무, 그리고 죄책감마저 담고 있는 단어인 반면, ‘부채’(다네이온)는 상호 동등한 경제적 거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말입니다. 주인이 종의 빚을 탕감하는 것은, 단순히 금액의 문제가 아니라 동등한 형제적 관계로 받아들인다는 말입니다.
그럼에도 빚을 탕감받은 종의 무자비함에서 불행은 다시 불거지는데,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두어 버린 것입니다. ‘동료’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쉰둘로스’인데, ‘쉰’이라는 말은 ‘함께’라는 의미를 지니지요. 함께해야 할 사람을 감옥에 내던지는 이의 냉혹함은 주인의 자비로움과 대비되어, 보는 이에게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교회는 저마다 사는 처지가 다르고 능력이 달라도 서로 형제로서 책임을 함께 지는 데 그 본디 가치가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서로에 대한 빚을 갚아 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우리는 서로에게 빚이 있습니다. 네가 있기에 내가 살아간다는 최소한의 책임 의식이 교회는 물론이거니와 사회 공동체를 지탱합니다. 돈 몇 푼에 살의마저 느끼는 살벌한 세상에 교회의 형제애는 눈물겹도록 요긴한 신앙인의 책무입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