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20일 토요일
[녹] 연중 제33주간 토요일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예레 29,11.12.14 참조
본기도
말씀의 초대
안티오코스 임금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 때문에 자신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닫고 큰 실망을 안고 죽어 간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 때문에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죽어 가네.>6,1-13
화답송시편 9,2-3.4와 6.16과 19(◎ 15ㄷ 참조)
복음 환호송2티모 1,10 참조
복음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20,27-40
예물 기도
영성체송 시편 73(72),28
마르 11,23.24 참조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텔레비전의 토론 프로그램이나 청문회, 아니면 국회에서 실시하는 대정부 질문 영상을 보면서 때로는 ‘정말 궁금해서 질문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답은 정해져 있고 질문에 답하는 사람을 궁지에 몰기 위하여 질문합니다. 상대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고 내 생각과 주장이 옳음을 드러내려고 질문합니다. 나아가 상대방 자체를 판단하고 규정지어 그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을 비판하고 잘못된 것으로 몰아갑니다. 우리가 하는 질문들을 살펴보아도 이런 판단과 확증 편향은 비일비재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들에게 그런 식의 질문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고 있는 그들은 마지막으로 자신들의 질문을 통해서 그분을 고발하려고 만반의 준비를 합니다. 그런 그들에게도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의미와 하느님의 구원에 대하여 설명해 주십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아마도 사두가이들은 그들의 선조들이 체험했던 하느님 안에 갇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지금 여기에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와 만나십니다. 또한 나에게만 찾아오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십니다. 자신들의 이론과 배움, 체험과 경험에만 갇혀 있던 사두가이들은 이를 제대로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으며, 제대로 판단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 논쟁으로 사두가이들을 이해시키려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평생을 지녀 온 그들의 신념을 예수님의 한마디로 바꿀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열린 마음, 받아들이는 여유를 바라신 것은 아닐까요? 자신이 언제나 옳을 수는 없음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나약함, 부족한 이해와 판단을 바라보라고 이야기하신 것이 아닌지 짐작해 봅니다. 그러한 열린 마음이 지금 여기에서 나와 함께 살아가시는 하느님을 느끼게 해 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산 이들의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