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15일 월요일
[녹]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또는
[백] 성 대 알베르토 주교 학자
입당송 예레 29,11.12.14 참조
본기도
말씀의 초대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 임금은 번제 제단 위에 황폐를 부르는 혐오스러운 것을 세우고 율법서를 불태우게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예리코의 눈먼 이가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부르짖자, 그의 믿음을 보시고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신다(복음).
제1독서
<크나큰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내렸다.>1,10-15.41-43.54-57.62-64
화답송시편 119(118),53.61.134.150.155.158(◎ 88 참조)
복음 환호송요한 8,12 참조
복음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18,35-43
예물 기도
영성체송 시편 73(72),28
마르 11,23.24 참조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운전을 하다가 터널에 진입하였는데, 갑자기 앞이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조등도 켜져 있었고, 터널 안에 전등들도 이상 없이 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어두운 거지?’ 알고 보니 강한 햇볕에 눈이 부셔 썼던 선글라스 때문이었습니다. 쓰고 있던 선글라스만 벗으면 될 일을 기계의 오류나 터널 자체의 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창피하고 우스운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삶을 바라보는 우리의 판단 또한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라는 말처럼 어떤 상황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잘못보다는 세상과 주변의 문제점을 먼저 생각합니다. 나는 잘하고 있는데, 주위에서 도와주지 않는다거나 내 생각을 받아 주지 않는다며, 실망하고 짜증을 부립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리코의 눈먼 이가 예수님을 찾아와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라고 청합니다. 이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했던 것은 아닌 듯합니다. “다시” 볼 수 있기를 청하지요. 볼 수 있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예고(루카 18,31-34 참조) 바로 다음에 예리코의 눈먼 이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이곳 예리코는 갈릴래아를 떠나 사마리아를 거쳐 시작된 예루살렘으로의 여정(루카 9,51─19,27 참조) 중 마지막 장소입니다. 이렇게 루카 복음사가는 갈릴래아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을 거치며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의 삶을 바라본 사람들에게, 또한 자신의 이야기를 읽고 있는 독자들에게 예리코의 눈먼 이를 빗대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의 삶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을 본다고는 하지만, 자신의 욕심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야 합니다. 욕심과 욕망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예수님과 세상을 바라보았기에 예루살렘에서의 비극은 발생합니다. 그 색안경을 벗을 때, 비로소 우리에게도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요. 세상이 달라지려면 자신이 제대로 보고 있는지, 자신의 색안경이 어떤 색깔인지 바로 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주님, 제가 제대로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