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9월 27일 일요일
[녹] 연중 제26주일 (이민의 날)
한국 천주교회는 사도좌와 뜻을 같이하여,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이주 노동자들과 이민자들에게 더욱 깊은 사목적 관심을 기울이고자 2001년부터 ‘이민의 날’을 지내고 있다(주교회의 2000년 춘계 정기 총회).
보편 교회가 2019년부터 ‘세계 이민의 날’을 1월(주님 공현 대축일 이후 주일)에서 9월 마지막 주일로 옮겨 지내기로 함에 따라, 우리나라도 이에 맞추어 ‘이민의 날’을 지내기로 하였다(주교회의 2019년 춘계 정기 총회).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26주일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끊임없이 하느님의 법을 따라 공정과 정의의 길을 걸으라고 촉구합니다. 죄인에게도 회개를 통하여 이러한 길이 열려 있으나,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는 이는 오히려 유혹에 걸려 넘어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미사에서 우리가 주님의 길을 꿋꿋이 걸어갈 수 있는 용기와 인내를 청합시다.
입당송 다니 3,29.30.31.43.42 참조
본기도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말씀의 초대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께서 공평하다고 여기시는 인생길을 전해 준다. 의인이라 할지라도 정의를 버리고 돌아서면 죽을 것이며, 악인이라도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버리고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살 것이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무슨 일이든 이기심과 허영심이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하라고 당부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간직해야 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신 마음이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드시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참되게 실천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깨닫게 하신다. 그리고 의로운 길에 대한 가르침을 믿은 세리와 창녀들이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다(복음).
제1독서
<악인이라도 죄악을 버리고 돌아서면, 자기 목숨을 살릴 것이다.>18,25-28
화답송시편 25(24),4-5.6-7.8-9(◎ 6ㄴ 참조)
제2독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 안에 간직하십시오.>2,1-11
2,1-5
복음 환호송요한 10,27 참조
복음
<맏아들은 생각을 바꾸어 일하러 갔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21,28-32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도움의 원천이신 주님, 주님을 따르고자 노력하는 교회를 굽어보시어, 주님을 위해서라면 하기 싫은 일도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앞장설 수 있는 용기와 힘을 주소서.
2. 정치인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의로우신 주님, 정치인들을 주님의 사랑과 정의로 이끌어 주시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먼저 살피게 하시고, 올바른 정책을 마련하여 공동선을 실현하게 하소서.
3. 이민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위로자이신 주님, 살던 곳을 떠나 낯선 문화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이민들을 굽어살피시어, 그들을 위로하시고, 안정된 생활 속에서 미래를 꿈꾸며 힘차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4. 지역 사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저희가 몸담고 있는 이 생활 공동체를 사랑으로 이끄시어, 주님께서 주신 본디 모습을 온전히 가꾸며, 구성원 모두가 다 함께 행복할 수 있게 하소서.
예물 기도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6 : 영원한 파스카의 보증>영성체송 시편 119(118),49-50 참조
1요한 3,16 참조
영성체 후 묵상
▦ 주님의 계명은 실천을 요구합니다. 주님의 계명을 머리로 이해하고 말로는 동의하면서도 실행하는 것을 교묘히 회피하는 위선은 신앙생활의 큰 병입니다. 겸손한 마음을 지니지 못할 때 깊어지는 위선의 병을 우리는 고치기는커녕 제대로 바라보지도 못합니다. 늘 겸손하게 자신을 살피며 하느님과 이웃에게 자신을 열고, 고해성사를 통하여 우리의 위선적 태도를 고쳐 나가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은 꽤나 불편합니다. 나보다 못한 이들, 죄인들이 먼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사실이 꽤나 불편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잘한다고 생각해서 한 모든 일이 부정당하는 것 같아 불편하고, 분명히 잘못된 것인데 용인되는 듯하여 불편하고, 그래서 복음의 예수님이 얄밉기까지 합니다.
불편한 마음은 속일 수 없는 사실이니 그냥 두기로 합시다. 그런데 왜 불편한가를 되묻는 것은 어떨까요? 무슨 기준으로, 어떤 상식으로 우리의 불편함을 파헤쳐 볼 수 있을까요? 대개 불편함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어중간한 태도에서 비롯한다고 봅니다. 둘째 아들을 찬찬히 묵상해 봅니다. 그는 포도밭 일을 하기 싫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들 된 이가 아버지의 청을 거절하기도 힘들었겠지요. 일은 하기 싫으나 아들로서의 본분을 다하고자 둘째 아들은 포도밭에 가겠노라 답하였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을 탓할 이유는 없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네 삶의 모습이니까요. 하기 싫은 일이 더 많고, 그 일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웬만하면 쉽고 하고 싶은 일만 하기를 원하는 것이 우리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서로의 관계 안에서 어정쩡한 중간적 자세를 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도 아니고 ‘아니요.’도 아닌, 서로 얼굴 붉히지 않는 선에서 적당한 말과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자세, 이런 자세가 오늘 복음의 예수님보다 더 얄밉지 않으신가요?
맏아들은 솔직하게 ‘싫습니다.’라고 말하였지만 스스로 생각을 바꾸어 일을 하였습니다. 세리와 창녀들도 솔직하였습니다. 시대의 죄인으로서 솔직한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는 이들이었지요. 믿음도 그렇습니다. 긴가민가 뭉그적거리는 자세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솔직히 답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런데 저는 믿음이 약합니다. 너무 약하여 포도밭까지 걸어가기가 너무 힘듭니다. 그래서 저는 빌고 빌 뿐입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사, 저를 위하여 빌어 주십사 신앙 공동체에 함께하시는 여러분에게 부탁드릴 뿐입니다. 세리와 죄인 취급받기를 간절히 빌고 또 빌 뿐입니다. 이 못난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 가고픈 마음이 있으니까요.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