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07일 일요일
[녹]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
평신도는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으로서, 성직자가 아닌 모든 신자를 가리킨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평신도의 역할을 크게 부각하면서, 평신도를 통하여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는 이러한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1968년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지금은 ‘한국 천주교 평신도 사도직 단체 협의회’)의 결성과 더불어 해마다 대림 제1주일을 ‘평신도 사도직의 날’로 지내기로 하였다. 평신도들에게 주어진 사도직의 사명을 거듭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 뒤 1970년부터는 연중 마지막 주일의 전 주일을 ‘평신도 주일’로 지내 오다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연중 마지막 전 주일을 ‘세계 가난한 이의 날’로 정하시면서 2017년부터 한 주 앞당겨 지내고 있다.
오늘 전례
▦ 오늘은 연중 제32주일이며 평신도 주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아들과 과부들의 아버지, 떠돌이들의 피난처, 억눌린 이들의 정의이시니, 하느님 사랑에 의탁하는 불쌍한 이들을 지켜 주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시는 자유와 빵을 넉넉히 얻어,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가진 것을 형제들과 함께 나누도록 합시다.
입당송 시편 88(87),3 참조
본기도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는 성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말씀의 초대
엘리야 예언자는 사렙타의 과부에게 물과 빵을 청하고는, 그 여자의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헌금함에 돈을 넣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과부는 밀가루로 작은 빵을 만들어 엘리야에게 가져다주었다.>17,10-16
화답송시편 146(145),6ㄷ-7.8-9ㄱ.9ㄴㄷ-10ㄱㄴ(◎ 1ㄴ)
제2독서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의 죄를 짊어지시려고 단 한 번 당신 자신을 바치셨습니다.>9,24-28
복음 환호송마태 5,3
복음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12,38-44
12,41-44
보편 지향 기도
<각 공동체 스스로 준비한 기도를 바치는 것이 바람직하다.>1. 교회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목자이신 주님, 주님의 백성인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을 주님의 진리로 이끌어 주시고, 특히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이하여, 보편 사제직을 수행하는 평신도들이 주님께 온전히 의지하며 평화의 은총을 누리게 하소서.
2. 세계 평화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만물의 주님, 온 인류가 터전을 이루고 살아가는 지구를 보살펴 주시어, 인류가 자연을 보호하고 지키며 자연과 화해를 이루어 더욱더 평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 가게 하소서.
3. 부부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의 근원이신 주님, 세상의 모든 부부가 사랑으로 하나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소중히 받아들여 주님 창조 사업의 협조자가 되며 주님 사랑의 증인이 되게 하소서.
4. 본당 공동체를 위하여 기도합시다.
참스승이신 주님, 저희 본당 공동체를 굽어보시어, 위령 성월의 의미를 되새기고 깊이 묵상하며, 참된 신앙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게 하소서.
예물 기도
감사송
<연중 주일 감사송 6 : 영원한 파스카의 보증>영성체송 시편 23(22),1-2
루카 24,35 참조
영성체 후 묵상
▦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기 때문이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사렙타의 과부를 향한 하느님의 축복 말씀이 들립니다. “밀가루 단지는 비지 않고 기름병은 마르지 않을 것이다.”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위선적인 삶이란 어떤 삶일까요? 거짓과 가식으로 꾸며진 삶, 겉으로는 선함을 자랑하면서 진심을 숨기는 삶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실 우리도 어느 정도 위선적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신을 포장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좋게 보이려 노력합니다. 저 또한 위선적이었습니다. 저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보다 조금은 포장한 삶을 보여 주려 하였습니다. 신자들과 면담할 때에도 진심을 담아서 대화하려고 노력하지만, 때로는 사제로서 해 주어야 할 말이 무엇인지에 더 신경을 집중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하여 위선적이고 가식적인 삶을 비판하십니다. 율법 학자의 가식을, 부자의 위선적인 행동을 비판하시고, 그런 그들보다 가난하지만 진심을 다하는 과부의 행동을 칭찬하십니다. 그런데 문득 ‘가난한 과부도 위선으로 자신의 행동을 포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의 성격과 가르침을 알고 있는 과부였다면, 자신의 행동을 보고 예수님께서 칭찬하실 것을 미리 짐작하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그래서 아깝지만 자신의 모든 재산을 헌금함에 넣은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이지요. 쓸데없는 의심이고 그릇된 전제에서 나오는 상상임을 저 또한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위선’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묵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선은, 어쩌면 가식적인 행동이나 과시의 외적 표현보다는, 이기적인 의도에 더 큰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타인을 위하여 사는 모습을 보여 주면서도, 이른바 꼼수를 부리면서 실제로는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가장 위선적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구나 어느 정도 자신을 포장하기도 하고, 과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포장과 과시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다시 한번 고민해 본다면, 가난한 과부의 행동 같은 포장이나 과시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하느님께서도 귀엽게 보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