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5월 02일 목요일
[백] 성 아타나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295년 무렵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난 아타나시오 성인은 알렉산데르 대주교를 수행하여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 참석하였다. 328년 알렉산데르 대주교의 후계자가 된 뒤, 아리우스파에 맞서 싸우다가 여러 차례 유배를 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정통 신앙을 해설하고 옹호하는 책을 많이 남겼으며, 수도 생활의 창시자인 안토니오 성인의 전기를 써서 서방 교회에 수도 생활을 알리기도 하였다.
입당송 집회 15,5 참조
본기도
제1독서
<내 판단으로는,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하느님께 돌아선 이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말아야 합니다.>15,7-21
화답송시편 96(95),1-2ㄱ.2ㄴ-3.10(◎ 3 참조)
복음 환호송요한 10,27 참조
복음
<너희 기쁨이 충만하도록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15,9-11
예물 기도
감사송
<부활 감사송 1 : 파스카의 신비>영성체송 1코린 3,11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어제에 이어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도, 유다인들의 ‘옛 계명’과 그리스도인들의 ‘새 계명’이 대조됩니다. 독서는 ‘예루살렘 공의회’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새롭게 믿게 된 이들이 더 이상 유다인들의 외적 관습을 지킬 필요가 없음을 밝힙니다. “여러분은 왜 우리 조상들도 우리도 다 감당할 수 없던 멍에를 형제들의 목에 씌워 하느님을 시험하는 것입니까?”
복음은 유다인들의 옛 전통과 율법을 완성할 새로운 계명으로 ‘사랑’을 제시합니다. 인간은 율법의 준수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으로 구원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특별히 이 말씀은 지금까지의 ‘비유’(참포도나무와 가지)와 달리 갑자기 명령형이 사용되고 직접 화법으로 강조됩니다. 그리고 이때 쓰인 동사 ‘사랑하다’(‘아가파오’)는 상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의지적 행위를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복음이 구원에 이르는 길로 제시한 사랑은 상대를 위하여 ‘죽는 것’, ‘목숨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그저 가만히 멈춘 상태로 있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그 사랑의 본질에 다가가는 여정을 뜻합니다. 역설적이게도, 상대를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내주고 상대를 대신해서 죽을 때, 오히려 그 사랑은 온전히 살아나고 자신도 구원됩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 준 만큼 영원한 생명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실존하는 가장 큰 힘이며 신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려 주시고, 그 이유도 말씀하여 주십니다.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고 또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