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8월 03일 토요일
[녹] 연중 제17주간 토요일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시편 68(67),6-7.36 참조
본기도
제1독서
<참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이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26,11-16.24
화답송시편 69(68),15-16.30-31.33-34(◎ 14 참조)
복음 환호송마태 5,10
복음
<헤로데는 사람을 보내어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가서 알렸다.>14,1-12
예물 기도
영성체송 시편 103(102),2
마태 5,7-8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헤로데가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신다는 말을 듣고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났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면, 그는 요한이 누구인지 온전히 알지는 못하였지만 요한이 지닌 능력을 인정하기는 하였던 것입니다. 자신은 요한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데 다만 군중이 그를 예언자로 여기기 때문에 건드리지 못한 것이 아니라, 참으로 그가 하느님의 사람임을 알아보았던 것이겠지요.
그런데 요한을 죽이는 사람은 결국 헤로데입니다. 핑계를 대어도 소용없습니다. 헤로디아 때문에, 살로메 때문에 죽였다고 말하고 싶었을까요? 헤로디아의 딸에게 약속하고 맹세한 것도 헤로데이고, 요한의 목을 베라고 끝내 명령을 내린 것도 헤로데입니다. 그는 진리를 알고 있었으나 자기 손으로 진리를 죽입니다.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에게는 ‘더 중요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은 갈라졌습니다. 갈라진 마음에서 80퍼센트 정도 진리를 따르고 하느님을 따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어느 순간에 진리를 저버릴 수 있습니다. 그가 양보할 수 없는 나머지 20퍼센트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려놓을 수 없는 무엇이 남아 있을 때 그 진리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예레미야는 자기 목숨을 사람들의 손에 맡깁니다. 그들에게는 하느님의 말씀이 무엇보다, 자기 목숨보다 중요하였고 80퍼센트가 아닌 100퍼센트를 그 말씀에 바쳤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6). 따름은 ‘전부’를 요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