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1월 24일 금요일
[백]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학자 기념일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은 1567년 이탈리아의 사보이아에서 한 귀족 가문의 맏이로 태어났다. 1593년 사제가 되어 선교사로 활동한 그는 특히 칼뱅파의 많은 개신교 신자를 가톨릭으로 회심시켰고, 1599년 제네바의 부교구장 주교로 선임되었으며, 1602년에 교구장이 되었다. 그는 많은 저서를 남기고, 1622년 12월 28일 리옹에서 세상을 떠나 1623년 1월 24일 안시에 묻혔다.
입당송 에제 34,11.23-24 참조
본기도
말씀의 초대
제1독서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에게 손을 대지 않겠다.>24,3-21
화답송시편 57(56),2.3-4.6과 11(◎ 2ㄱ)
복음 환호송2코린 5,19 참조
복음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원하시는 이들을 부르시어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셨다.>3,13-19
예물 기도
영성체송 요한 15,16 참조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열둘’이라는 숫자의 의미를 묵상합니다. 유다 사회는 그 숫자를 ‘민족’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이룬 통일 왕국을 상징하는 것이 ‘열둘’이었고,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돌아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곧추세울 때 사용한 숫자가 ‘열둘’이었습니다. 곧 ‘열둘’은 참된 신앙을 지닌 하느님 백성을 가리키는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뽑으시고 파견하신다고 하여서, 요즘의 ‘경쟁 의식’을 염두에 둔 해석을 하여서는 안 됩니다. 열둘은 다른 이들과 달리 능력 있는 이들로 뭉친 특정 계급이 아니라, 모든 이가 예수님의 참제자가 될 수 있다는 무한한 초대의 자리로 이해해야 합니다. 어떠한 차별도 없이 예수님 곁에 머물며, 모든 이에게 파견되어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열둘의 참된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 곁의 또 다른 열둘을 생각합니다. 이웃을 생각하기에 앞서 나 자신이 ‘열둘’의 범주 안에 함께하는지 되돌아봅니다. ‘열둘’이기 위하여 스스로를 가두어 놓는 일이 없는지, 나는 진정 자유로운지 되물어 봅니다. 예수님의 ‘열둘’은 너무나 다른 사상과 삶의 방식을 지닌, 도무지 하나가 될 수 없는 이들로 짜여 있습니다. 우리 각자 안에서도 너무나 다른 생각들이 부딪치고 갈라지고 있을 테지요. 그런 나를 진정 사랑하고 또한 그런 나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열둘’의 자리는 무한한 우주처럼 유연하고 여유로워야 합니다. ‘이런 사람만이 제자여야 해!’라는 독선은 내려놓고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