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09월 23일 수요일
[백]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알려진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품을 받은 그는 풀리아의 산조반니 로톤도 수도원에서 사목적 열정으로 봉사 직무에 헌신하면서, 신자들의 영성을 지도하고 참회자를 화해시켰으며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보살피고 기도와 겸손으로 하느님의 백성을 섬겼다. 그는 1918년부터 1968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50년 동안,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상처를 온전히 몸에 지니고 고통을 느꼈다.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시성하셨다.
입당송 시편 132(131),9 참조
본기도
말씀의 초대
잠언의 저자는,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시라고 주님께 간청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며,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이르신다(복음).
제1독서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30,5-9
화답송시편 119(118),29.72.89.101.104.163(◎ 105ㄱ 참조)
복음 환호송마르 1,15
복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9,1-6
예물 기도
영성체송 마태 24,46-47 참조
루카 12,42 참조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복음 선포와 치유 능력은 쌍을 이루고 함께 나아갑니다. 말하자면 복음 선포는 인문학적 소양이나 객관적 지식의 함양과는 결을 달리하고, 동시에 우리 삶 곳곳에서 직접적이고 가시적인 기쁨으로 드러나야 한다는 말입니다.
걱정입니다. 대다수의 종교가 현실 도피적 위로의 기능만을 수행하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기우이기를 바라나 많은 신앙인이 성당이나 교회에 와서는 세상사 잊고 그저 하느님 안에 조용히 위로받고 싶어 하는 마음을 지니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는 것이 팍팍하고 때로는 내려놓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그럼에도 그리스도교는 세상에 파견되어 세상의 질병을 고쳐 주어야 합니다. 코로나19 사태로 긴박히 돌아가는 세상에서 교회는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홀로 베드로 광장에서 강복하시는 장면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력함과, 그럼에도 세상을 향하여 무엇이든 해 주시려는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교회가 세상의 질병을 고쳐 주고 보듬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직접적인 기쁨, 가시적인 치유를 말하기 전에 오늘 복음 한 구절을 다시 묵상하려 합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는 말씀은 언뜻 보기에 무소유의 편안함을 의미하는 듯싶지만 실은 ‘현실주의’에 대한 과감한 저항입니다.
돈이 있어야 성공이든 행복이든 말할 수 있다는 현실에서 돈 한 푼 없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 현실을 우리는 내려놓고 비워 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은 치유됩니다. 더 쥐려고 경쟁하는 세상을 아무리 치유하고 위로한들 더 큰 질병이, 더 큰 바이러스가 우리를 공격할 것입니다. 질병의 고통은 가난한 이들에게 차곡차곡 쌓이고, 그로 말미암은 부는 사회 상층부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가난한 이들의 질병을 직접적이고 가시적으로 고쳐 주는 것은, 조금이라도 더 가진 이들이 나눌 때 가능합니다. 복음 선포와 치유 능력은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의 실천만 남았습니다.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