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03월 14일 화요일
[자] 사순 제3주간 화요일
입당송 시편 17(16),6.8 참조
본기도
제1독서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받아 주소서.>3,25.34-43
화답송시편 25(24),4-5ㄱㄴ.6과 7ㄴㄷ.8-9(◎ 6ㄴ 참조)
복음 환호송요엘 2,12-13 참조
복음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18,21-35
예물 기도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영성체송 시편 15(14),1-2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오늘의 묵상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이 질문의 바탕에는 당시 유다인들의 생각이 깔려 있는 듯합니다. 유다교에도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에 대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라삐들은 같은 죄를 세 번 용서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유다인들의 관습을 생각한다면 베드로 사도의 질문은 훨씬 더 관대합니다.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그보다 더 큰 자비를 실천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인의 윤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일흔일곱 곱절’입니다(창세 4,24 참조). 어떤 학자들은 ‘일곱 번’을 ‘일흔 번’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수가 얼마나 큰지를 떠나서 자신에게 잘못한 형제를 용서하는 데 제한을 두지 말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비유에 등장하는 두 종의 모습에서 예수님의 가장 큰 계명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이 비유에서 강조되는 것은 ‘용서받는’ 것과 ‘용서하는’ 것입니다. 만 탈렌트라는, 당시에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엄청난 빚을 탕감받은 종이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형제를 용서하지 못합니다. 의미로 본다면 본인은 엄청난 죄를 용서받았으면서도, 형제의 죄는 좀처럼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중요한 점은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입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보다 용서받은 체험이 먼저입니다. 우리는 용서받은 모습 그대로 이웃의 잘못을 용서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가엾이 여기십니다. 이 마음을 본받아 우리도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실천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