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3월 23일 토요일
[자] 사순 제5주간 토요일
입당송 시편 22(21),20.7 참조
본기도
제1독서
<그들을 한 민족으로 만들겠다.>37,21ㄴ-28
화답송예레 31,10.11-12ㄱㄴ.13(◎ 10ㄹ 참조)
복음 환호송에제 18,31 참조
복음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리라.>11,45-56
예물 기도
감사송
<주님 수난 감사송 1 : 십자가의 힘>영성체송 요한 11,52 참조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의 라자로를 살리신 뒤 그분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극명하게 갈립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바리사이들에게 가서” 이 일을 알립니다. 결국 유다인들의 최고 의결 기구인 산헤드린까지 개입하여 예수님에 대하여 논의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유다 지도층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임금’(다윗 가문의 메시아)으로 인정하면, 로마인들이 이를 정치적 반란으로 규정할까 보아 우려를 표합니다.
결국 대사제 카야파가 이 모든 논쟁의 해법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낫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이는 철저하게 정치적 발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제안에는 희생될 존재의 무죄 여부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희생양이 될 존재가 모든 혼란과 불안을 끝내 줄 결정적 동기가 되어 주면 그만일 뿐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카야파의 이 불의한 결정도 당신 섭리에 활용하십니다. 대사제의 입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민족을 위한” 것이고 이를 통하여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는 사건임이 선언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산헤드린의 수장이었던 대사제의 제안에 따라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합니다.
‘두려움’은 질투와 경쟁심에서 시작됩니다. 산헤드린은 민족주의적 감정을 명분 삼아 자신들의 불안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였지만, 사실 그 두려움은 예수님에 대한 질투에서 나왔습니다. 기득권자들의 두려움은 민중의 작은 움직임도 하나같이 ‘반역’으로 선고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독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들과 평화의 계약을 맺으리니, 그것이 그들과 맺는 영원한 계약이 될 것이다.” “그제야 민족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