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06월 27일 금요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 (사제 성화의 날)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공경하며 그 마음을 본받고자 하는 날이다. 이 대축일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다음 금요일에 지내는데, 예수 성심이 성체성사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은 중세 때 시작하여 점차 보편화되었다. 1856년 비오 9세 교황 때 교회의 전례력에 도입되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대축일로 지내고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권고에 따라, 1995년부터 해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사제 성화의 날’을 지내고 있다. 이날은 사제들이 대사제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복음 선포의 직무를 더욱 훌륭히 수행하는 가운데 완전한 성덕으로 나아가고자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교회의 모든 사람이 사제직의 존귀함을 깨닫고 사제들의 성화를 위하여 기도와 희생을 바치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 전례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이며 사제 성화의 날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십니다. 사제들이,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찾고자 애쓰시는 예수님의 성심을 닮은 착한 목자가 되도록 기도합시다.
입당송 시편 33(32),11.19 참조
본기도
저희 죄 때문에 상처를 입으신 아드님의 성심을 보시고
저희에게 무한한 사랑을 인자로이 베푸시니
저희가 그 성심을 정성을 다하여 공경하며
마땅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제1독서
<내가 몸소 내 양 떼를 먹이고, 내가 몸소 그들을 누워 쉬게 하겠다.>34,11-16
화답송시편 23(22),1-3ㄱ.3ㄴㄷ-4.5.6(◎ 1)
제2독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5,5ㄴ-11
복음 환호송마태 11,29 참조
복음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15,3-7
예물 기도
감사송
<주님의 축일과 신비 감사송 4 : 그리스도의 무한하신 사랑(예수 성심 대축일)>영성체송 요한 7,37-38 참조
요한 19,34 참조
영성체 후 묵상
목자가 자신의 양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을 때까지 뒤쫓아 가듯, 하느님께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하십니다. 사제들이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닮을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하느님 자비의 비유’라고 불리는 루카 복음서 15장의 되찾은 것들의 비유(15,1-32 참조)는 ‘하느님 기쁨의 비유’라고도 불릴 만합니다. 기쁨은 자비를 넘어섭니다. 누군가에게 기쁨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자비의 대상이 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자비는 우리가 하느님에게서 받는 것이고 기쁨은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분께 돌아감으로써, 그분께 발견됨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 나서시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우리가 그분께 발견되도록 자신을 내맡겨야 합니다.
누구나 길을 잃을 수 있지요. 중요한 것은 다시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나를 찾으시는 분 앞에 나와 서기만 하면 됩니다. “저 여기 있습니다!” 그러면 그분께서는 우리를 품에 안아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얼마나 기쁜가! 내 아들이, 내 딸이 돌아왔다!” 우리가 할 일은 그저 그분의 눈길 아래 머무르는 것입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 대축일에 듣는 이 복음은 예수님 마음을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그리스도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사랑에서 출발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교회는 이 신심이 시작되던 시대의 심장이라는 상징을 넘어서서 그 실체인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통합적 신심을 기르도록 권고합니다. 사실 예수님 마음은 그분의 전 인격을 요약합니다. 그래서 예수 성심의 신비는 ‘예수님의 구원적 사랑 전체’의 신비입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의 기도를 바치며 이 신비 안에 머무르도록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오소서, 주 예수님, 저에게 오소서, 저를 찾으소서, 저를 발견하소서. 저를 품에 안아 데려가 주소서”(성 암브로시오, 『시편 118편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