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7월 02일 목요일
[녹]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입당송 시편 47(46),2
본기도
제1독서
<가서 내 백성에게 예언하여라.>7,10-17
화답송시편 19(18),8.9.10.11(◎ 10ㄷㄹ)
복음 환호송2코린 5,19 참조
복음
<군중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권한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9,1-8
예물 기도
영성체송 시편 103(102),1
요한 17,20-21 참조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신형철 문학 평론가는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에서 다음과 같이 힘주어 말합니다. “고통의 공감은 일종의 능력인데, 그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이 잘 모르는 고통에는 공감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한심한 한계다. 경험한 만큼만, 느껴본 만큼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래서 고통에 대한 공부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한다.”
다른 이의 고통과 아픔, 슬픔에 온전히 가닿을 수 없는 “한심한 한계”를 인정할 때 공부의 필요성을 느낍니다. “고통에 대한 공부”라는 표현이 새삼스럽지만, 이보다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이 또 어디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 공부 없이는 ‘너’를 이해한다는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율법 학자들은 중풍 병자가 겪는 고통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누워 있는 중풍 병자에게 눈길이 쏠려 있을 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온 신경이 곤두서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지켜 온 율법의 전통에 따라 예수님의 말씀을 평가하고, 속으로 그분을 죄인으로 낙인찍기에 바쁩니다. 하느님의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법이 향하고 있는 본질과는 한참 멀어져 있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다른 이들의 고통보다는 자신들이 만들어 온 세계가 무너지는 데에 더 관심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길은 달랐습니다. 그분께는 중풍 병자가 용기를 내 하느님과 화해를 이루고 다시 일어나 걷는 것만이 중요하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이신 분께서 사람이 되어 오신 까닭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산다는 것은, 이처럼 우리의 “한심한 한계”, 곧 나 자신에게만 쏠리는 눈길을 부단히 넘어서고자 공부하며 사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