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19일 토요일
[녹] 연중 제28주간 토요일 또는
[홍] 성 요한 드 브레뵈프 사제, 성 이사악 조그 사제와 동료 순교자들 또는
[백] 십자가의 성 바오로 사제 또는
[백] 복되신 동정 마리아
입당송 시편 130(129),3-4 참조
본기도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만물 위에 계신 그리스도를 그분의 몸인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1,15-23
화답송시편 8,2와 3ㄷㄹ.4-5.6-7ㄱ(◎ 7ㄱ 참조)
복음 환호송요한 15,26.27 참조
복음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성령께서 그때에 알려 주실 것이다.>12,8-12
예물 기도
영성체송 시편 34(33),11
1요한 3,2 참조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오늘의 묵상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루카 12,11) 끌려가게 된다면 미리 걱정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 보니, 예수님 시대에는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안다고 증언하는 것이 지금보다 훨씬 위험하고 어려웠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당’을 말하는 것은, 아직 로마인들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기 전에도 유다인 출신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회당에서 쫓겨나고 박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자렛 회당에도 가셨고 예루살렘 성전에도 가셨으며,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이 성전에 기도하러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그리스도인들은 유다교 회당과는 분리되고 배척을 받습니다. 로마의 박해도 곧 다가옵니다. 복음서가 작성되고 나서 이백 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교회는 박해를 받았고, 예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곧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순교자들을 기억하여 봅니다. 그들이 잡혀갈 때, 무슨 말을 할지 염려하였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그들은 세례를 받는 순간부터 이미 순교를 각오한 것이었고, “회당이나 관청이나 관아에” 끌려가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신앙을 당당하게 증언할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그들은 살아남고자 할 말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그것도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지극히 단순하게 목숨을 내놓음으로써 신앙을 고백하고 죽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할지 염려한다면, 그것은 순교자들만큼 우리의 신앙이 절실하지 않으며 우리가 목숨을 보전하고자 전전긍긍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