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2월 20일 금요일
[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입당송 시편 30(29),11
본기도
제1독서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58,1-9ㄴ
화답송시편 51(50),3-4.5-6ㄱㄴ.18-19(◎ 19ㄴㄷ)
복음 환호송아모 5,14 참조
복음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9,14-15
예물 기도
감사송
<사순 감사송 1 : 사순 시기의 영성적 의미>영성체송 시편 25(24),4
영성체 후 묵상
영성체 후 기도
백성을 위한 기도
<자유로이 바칠 수 있다.>오늘의 묵상
“부서지고 뉘우치는 마음을, 하느님, 당신은 업신여기지 않으시나이다.” 오늘 화답송은 참된 회개의 본질이 무엇인지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사실 회개를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뜻밖에도 ‘자존심’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너무 죄송해서 고해성사조차 볼 수 없다.”라는 말 속에는, 참된 뉘우침보다는 상처 입은 자존심이 앞서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럴 때 떠오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큰 잘못을 저지른 자녀가 죄책감과 당혹감에 휩싸여 집을 뛰쳐나갔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돌아와 문 앞에 서 있는 모습입니다. 그는 “부모님이 나를 받아 주실 리 없다.”라는 생각으로 자기 자신을 가로막지만, 정작 부모는 마음이 상하였을지언정 자녀를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여전히 사랑하고 기다립니다. 이런 끝없는 자책이 과연 부모에 대한 참된 미안함일까요?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자책은 여전히 자신의 기준으로 상황을 통제하려는 교만의 또 다른 얼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때때로 자책을 속죄로 착각하지만, 사랑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해명이나 보상이 아니라 ‘나’ 그리고 ‘나의 사랑’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 독서와 복음이 전하는 단식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겨 봅니다. 단식은 그저 ‘보여 주기 위한’ 행위도 아니고, 자신의 잘못에 대하여 “이 정도 뉘우치면 되겠지.” 하는 식의 거래도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단식하여 남겨 둔 것을 기꺼이 필요한 이에게 나눌 줄 아는 사랑의 실천, 곧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표현이어야 합니다. 사순 시기의 여러 결심에 앞서, 오늘 복음 환호송을 마음에 깊이 새겨 봅니다. “너희는 악이 아니라 선을 찾아라. 그래야 살리라. 그래야 주님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